중화사전망 - 구한말 사전 - 상당전투는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나요?
상당전투는 어떤 맥락에서 일어났나요?
상당 전투
해방 전쟁 초기, 산시-허베이-산동-허난 해방구의 군대가 산시성 창즈에 주둔했습니다. 1945년 8월 중하순, 국민당 제2전역 사령관 염석산은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제19군 사령관 시택보를 동원하여 17,000여 명의 인민을 통솔하게 하였다. 일본군과 괴뢰군은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산동(山东), 허난(河南) 해방구를 향해 진군했다. 산시-허베이-로위 군구 사령관 류보청(劉伯聲)과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孝平)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전국적 투쟁' 정책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를 완전히 따랐다. 침입한 적을 제거하고 31,0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9월 10일 전투에 돌입하였다. 첫째, 둔류, 창쯔 등 4개 도시를 회복하였다. 9월 20일부터 창즈는 동서남북에서 포위됐다. 안석산은 제7군 부사령관 팽위빈을 급히 동원하여 3군 8개 사단 23,000명을 거느리고 태원 남쪽으로 가서 장즈를 지원하게 했다. 산시-하북-로위 군구의 병력은 계속해서 1개 병력으로 장즈를 포위했고, 주력군은 증원군을 제거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10월 2일, 지원군은 둔류 서북부 지역에서 포위당했고, 4일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진현으로 도망친 2,000여 명을 제외한 국민당군은 모두 전멸했다. 창즈 수비군은 도움을 받을 가망이 없었기 때문에 8일 서쪽으로 돌격해 푸산(Fushan)과 이성(Yicheng)으로 탈출하려 했다. 산시(山西), 하북(河北), 산둥(山东), 우(玉) 지역의 태월군은 이들을 추적하고 추격해 12일 진허강 동쪽 강군령(江十陵), 도천(桃渡) 지역에서 전멸했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군은 국민당군 35,000명을 섬멸하고, 팽위빈을 사살하고, 사택보를 비롯한 사단장급 이상 장군 1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충칭협상투쟁에 효과적으로 협력했다.